1863년 12월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맺은 약속대로 둘째 아들인 명복을 후사로 지명 합니다. 그렇게 12살의 어린 고종은 아버지의 노력으로 인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하응 역시 '상갓집 개' 라는 비아냥을 받다 하루 아침에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렇게 4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왕이 즉위시 생존해있던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 합니다. 그리고 10여년간 조선의 실질적 통치자가 됩니다.


이때 세계의 역사를 어땠을까요?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부터 조선에도 프랑스 선교사가 입국해 선교 활동을 했으며, 전국에 천주교 신자의 수만 2만여명이 넘었습니다. 이밖에 의주 지역이나 동래 지역을 통해 서양의 물품들 역시 수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흥선대원군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이라는 타이틀 입니다.


처음부터 대원군이 서양과 교류를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였습니다. 대원군의 가족 역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죠.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낼 계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선교사의 배신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 역시 천주교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았습니다. 유생들을 비롯해 강력히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주장 합니다. 그리고 대원군은 엄청난 탄압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를 우리는 병인박해라고 부릅니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와 수천명의 신도들이 처형 당합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프랑스는 선교사의 탄압을 이유로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7척의 군함을 파견해 강화읍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한성근, 양헌수 부대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데 이 사건이 병인양요 입니다.



1. 독일 상인 오페르트로 인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인 쇄국정책 강화


병인양요가 발생후, 2년의 시간이 지났을때 입니다.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절 당합니다. 그러자 오베르트는 충정도에 있는 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습니다. 거기다 이들은 자신들이 독일인이 아닌 러시아 군사라고 자칭하며 총칼을 휘둘렀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이 사건은 미수에 그치게 됩니다. 하지만 전 조선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가 자신의 아버지의 무덤을 도굴하려거나 파헤쳤다면 가만히 있을 자식은 없기 때문이죠. 이 사건이 있은후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더 견고하게 합니다.


2.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침몰 사건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무단으로 국경을 넘어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평양 시민들이 이를 참지 못하고 상선을 침몰시켜 버립니다. 미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로저스 사령관을 필두로 5척의 군함으로 강화도를 고격 합니다. 바로 이 사건이 신미양요 입니다.


이처럼 역사에서 보듯, 흥선대원군 역시 처음부터 쇄국정책이라고 불리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행했던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 백성들의 생각과 계속된 대국들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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