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아들.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독살이 위협에 시달렸던 임금 정조. 사극이나 영화에서도 이야기의 소재기 많아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왕이 되었지만 초창기 자신의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임금 정조. 먼저 정조의 가계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같은 경우 장자가 왕위를 이어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왕이 된 경우 역시 적지는 않습니다.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에 태어난 사도세자의 손자 정조. 그러나 가계도를 살펴보면 효장세자의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세자 사후,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아들이 되기 때문 입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든 비정한 아버지지만 정조만큼은 정말 많이 아낍니다. 일반적으로 할아버지들이 아들보다 손자가 더 예쁘게 느껴진다는 것이 영조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요? 여담이지만 저의 부모님도 저보다 손녀딸을 볼때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임금 중 정조에 대한 관심 역시 대단 합니다. 왕에 대한 빅데이터를 보니 우리나라 국민들이 관심있어 하는 왕 가운데 5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위는 세종대왕, 2위는 태조 이성계, 3위는 가장 무능했던 임금 선조, 그리고 비운의 왕 고종, 다음으로 정조, 숙종, 영조 입니다.

 

 

현대인이 기억하고 있는 정조의 이미지는 어떨까요? 진심으로 조선을 사랑했던 성군 vs 아버지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임금 두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저역시 정조의 재위기간이 조금 더 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한편 아버지의 처참한 죽음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던 그의 심리는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역시 동시에 들기 때문 입니다.

 

영조의 재위기간 52년 동안 자신들의 위치를 더욱 곤고히한 노론 세력. 하지만 정조는 즉위후, 적극적인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지지할만한 세력이 부족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지지 기반이 되어 줄 규장각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 을 설치하고 호위군대인 장용영을 만들어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 합니다. 아마 때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정조가 즉위와 함께 적극적인 복수를 시작했다면 어땠을가요? 아마 노론  세력의 힘에 연산군과 같은 결말을 맺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당시 노론의 세력이 매우 컸기 때문 입니다. 정조 역시 영조와 함께 당파의 구분 없이 인재를 두루 고용하여 정치의 안정을 꾀한 탕평책을 적극 펼칩니다.

 

언제든지 제거 될 수 있는 불안한 상황에 보위에 올라 통합력을 갖추고 조선의 개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정조. 영조에 의해 죄인이 되어 버린 사도세자의 아들이었지만, 영조와 함께 조선의 정치 부흥을 이끈 가장 위대한 왕 중 한명인것은 분명 합니다. [자료: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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