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의 어린 나이에 조선의 26대 왕으로 즉위한 고종. 민치록의 막내딸 민자영과 결혼후, 1873년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며 직접 친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1882년에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기도 합니다. 커피를 좋아했던 왕. 1897년 10월에는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꿨지만 1907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퇴위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는 장레식에도 불참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효를 중시하는 조선시대에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먼저 고종 가계도를 살펴보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은 7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를 두었습니다. 명성왕후 민씨를 비롯해, 귀빈 엄씨, 귀인 이씨, 장시, 소의 이씨, 귀인 정씨, 양씨등 생각보다 조선시대 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후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료들을 보면 고종은 야행성 임금 이었다고 합니다. 요즘의 현대인과 비슷한 부분들이 많았는데요. 저역시 지금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글을쓰고 있는데 고종 역시 오전에 업무를 처리하기 보다 밤에 업무처리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커피를 많이 마셨기 때문 일까요?


역사적 사실로 봤을때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힘으로 인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왜 그토록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먼저 흥선대원군의 업적에 대해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를 동해 그동안 붕당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철폐 함으로써,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억제했습니다. 소위 당시 백수나 다름없는 양반들은 서원에서 학문을 핑계로 놀고 먹으며 백성들의 곡식을 수탈하는 등 원성을 받던 곳이기도 합니다. 학문이 아닌 백성의 피와땀을 빼앗는 곳이라는 생각에 과감히 철폐 합니다.


두번째는 비변사를 철폐 합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속에 국정의 전반을 총괄하던 비변사를 폐지 했는데요. 대신 이정부를 부활시킵니다. 세번째는 사창제를 실시해 환곡(봄에 곡식을 빌렸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 갚느 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저리로 곡식을 빌려주는 대여기관을 설치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햇살론, 새희망홀씨, 바꿔드림론 정도로 볼 수 있을듯 하네요. 가장 중요한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호포헙 입니다.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하게 끔 제도를 수정 했습니다. 당연히 양반층에는 반발을.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지지를 받게된 정책 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이런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갈등이 쌓이게 되는 계기는 고종의 나이 입니다. 역대 왕들의 사례를 살펴봐도 수렴청정을 하더라도 왕의 나이가 20세가 넘었다면 모두 왕에게 전권을 일임했지만 흥선대원군은 고종에게 어떠한 권한도 주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힘은 역시 부자 관계도 필요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고종이 친정을 원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 입니다. 첫째는 자신도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직접 정치를 하고 시다는 개인적인 욕망, 그리도 두번째는 아버지의 척화정책에 대한 일종의 반감 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종이 친정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때, 최익현의 상소는 흥선대원군 하야의 결정적인 핑계거리가 됩니다. 왕실과 관련 친족 계열은 지위를 높여주지만 국정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내용 인데요. 이 상소의 주체가 바로 흥선대원군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만한 내용 입니다. 


고종은 이를 수락하고 결국 흥선대원군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결국 권력 다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임오군란 이후 잠시 대원군은 집정을 하지만 이마저 청나라에 납치되는 신세가 되면서 33일만에 재집권에서 내려 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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